詩心의 향기/시詩(필사)

밤의 스핑크스 / 박형준

폴래폴래 2011. 12. 19. 11:30

 

 

 사진:네이버포토갤러리

 

 

 

 밤의 스핑크스

 

                                - 박형준

 

 

 

 GS25 편의점과 명지대학교 버스 정류장 사이

 셔터가 내려진 쥬얼리 숍

 

 그녀는 자정 너머의 어둠 아래 좌판을 펼친다

 골목을 메웠던 열정이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버스 정류장 앞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거나

 편의점에서 목마름을 해결하는 시간

 그녀가 바람과 같아서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다

 

 그녀는 좌판의 물건을 매일 바꾸지만

 그녀도 그녀의 물건도 쉽사리 어둠과 분간이 되지 않는다

 운동화 끈과 머리핀과 아크릴 털실이

 먼지와 비에 닳아 모서리를 잃거나

 수북이 눈을 맞아 형체만 세워진 날도 있었다

 그녀의 축 늘어진 뱃살이 어둠 아래

 층을 이루며 깊어간다

 가끔은 좌판에서 가슴에 부리를 묻고

 울음을 삼키는 외로운 목조(木鳥)가

 어두운 가로수 위로 날아간 날도 있었다

 그녀는 아랑곳 않고 자정 너머

 흐릿한 시간 앞에 펼쳐논 불행을 응시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고 새벽을 서성이는 사람들이 몇

 비로소 시무룩해진 어깨로 그녀와 그녀의 물건의 존재를 눈치챈다

 그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소한 위안의 보석이거나

 한 권의 책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시 씌어질 생을 노래할 수 있는 소재이지만

 어둠에 완벽히 적응한 그녀가 오늘도

 자정 너머에 좌판을 펼쳐놓는다

 가로수 위로 동이 틀 때까지

 

 시간의 화석이 자신의 세계를 내려다보며

 흐릿한 꿈에 잠겨 있다

 밤의 스핑크스가 자신의 발치에 놓인 물건에서

 천 년보다 더 많은 추억을 불러내고 있다

 

 

 

 시집『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문지 2011년

 

 

 

 

  - 1966년 전북 정읍 출생.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있다><춤>

    동서문학상, 현대시학작품상, 소월시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