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 꽃을 보러 갔다 / 최서림
아카시아 꽃을 보러 갔다
- 최서림
눈보다 염화칼슘이 더 많이 뿌려지는 아파트 옆
낡은 동네 연탄길을 기면서 내려오다
빙판길에 연탄재 같은 사람들의 정겨운 길을 내려오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카자흐스탄을 생각한다
눈에 폭삭 파묻힌 작은 마을들
빙판길 뒷골목의 구멍가게를 생각한다
언 손으로 호밀을 까부르고 있는 아낙의 눈물 속에
흩날리는 눈발 속에 아카시아 꽃이
방울방울 터지고 있다
깨어진 유리같이 망가진 시절이 있었다
지하에서 하루 종일 교정만 보다가
이러다 죽기엔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풍선을 날려 보내듯 사표를 낼까 생각하다가
멀리멀리 도망치듯
카자흐 고원에 휘날리는 눈발 같은
아카시아 꽃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세상 여기저기 널려 있는 카자흐스탄,
하릴없이 집에서 빈둥거리며
병든 수탉처럼 쪼아대는 남자들 틈에서
가난한 아낙들이 뚝뚝 떨어뜨리는 눈물,
삶의 진물 같은 젖빛 꽃을 보러 간 적이 있다
내 영혼에 튀밥처럼 피어나는 꽃을 보러 간 적이 있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말에 붙잡혀
꿀벌처럼 날아간 적이 있다
봄이 젖몸살을 하면서 짜낸 꽃,
아카시아에게 불려가듯 갔다
시집『물금』세계사 2010년
- 1956년 경북 청도 출생.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동 대학원 문학박사.
1993년『현대시』등단
시집<이서국으로 들어가다><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
<세상의 가시를 더듬다><구멍> 등
서울과학기술대 문창과 교수.
제1회 클릭학술문화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