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도감을 던지다 / 이덕규
식물도감을 던지다
- 이덕규
해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들판에는 참 많은 꽃들이 피어나지만 그 이름들을
낱낱이 아는 이는 우리 동네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씨 뿌릴 즈음에 피었다가
가을걷이 추수철이면 앙상한 꽃대들이 말라비틀어질 뿐, 더러는
사람들이 그 꽃 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들밥을 먹고
더러는 쇠똥에도 눌려 주저앉고 억센 맨발에 짓이겨져도 그것들은
늘 거기에 피었다가 지고 말 뿐
어느 누가 그 이름을 불러
아름답다거나 남루하다거나 신비롭다 하는 말을 했던가, 있는 듯 없는 듯이
서로에게 불러줄 이름이 없던 그 시절부터 맛 달고 향기로운 꽃 찾아 따 먹으며
나 여기까지 흘러왔느니 누구 하나 내게 그 이름 들려준 적 없고
너희들 이름 불러본 적 없었다
들꽃들아! 네 이름을 모르고 간 사람들
오늘 다시 이 외진 들길마다 못다 한 말 못다 한 울음 저토록 많은 씨알 속에서
터져 오르는데
저마다 아름답고 신비롭고 남루한 서러움의 향내 돌아 그렁그렁한 눈빛들 맞추고
바라보면
아 ─하, 늦저녁 들판에서 돌아오는 지친 암소 발굽에 쓰러지면서도 이른 저녁
별들에게
기꺼이 손 흔들어주던 낯익은 얼굴들,
통성명도 없이……, 너희들 이름을 내가 너무 많이 알아버리고 말았구나
시집『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 2009
- 1961년 경기 화성 출생.
1998년『현대시학』등단
시집<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