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식물도감을 던지다 / 이덕규

폴래폴래 2010. 9. 1. 01:18

 

 

 

 

 

 

  식물도감을 던지다

 

                                      - 이덕규  

 

 

 

 

  해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들판에는 참 많은 꽃들이 피어나지만 그 이름들을

  낱낱이 아는 이는 우리 동네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씨 뿌릴 즈음에 피었다가

  가을걷이 추수철이면 앙상한 꽃대들이 말라비틀어질 뿐, 더러는

  사람들이 그 꽃 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들밥을 먹고

  더러는 쇠똥에도 눌려 주저앉고 억센 맨발에 짓이겨져도 그것들은

  늘 거기에 피었다가 지고 말 뿐

 

  어느 누가 그 이름을 불러

  아름답다거나 남루하다거나 신비롭다 하는 말을 했던가, 있는 듯 없는 듯이

  서로에게 불러줄 이름이 없던 그 시절부터 맛 달고 향기로운 꽃 찾아 따 먹으며

  나 여기까지 흘러왔느니 누구 하나 내게 그 이름 들려준 적 없고

  너희들 이름 불러본 적 없었다

  들꽃들아! 네 이름을 모르고 간 사람들

  오늘 다시 이 외진 들길마다 못다 한 말 못다 한 울음 저토록 많은 씨알 속에서

터져 오르는데

 

  저마다 아름답고 신비롭고 남루한 서러움의 향내 돌아 그렁그렁한 눈빛들 맞추고

바라보면

  아 ─하, 늦저녁 들판에서 돌아오는 지친 암소 발굽에 쓰러지면서도 이른 저녁

별들에게

  기꺼이 손 흔들어주던 낯익은 얼굴들,

  통성명도 없이……, 너희들 이름을 내가 너무 많이 알아버리고 말았구나

 

 

 

 

 

  시집『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  2009

 

 

 

 

 

  - 1961년 경기 화성 출생.

     1998년『현대시학』등단

     시집<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