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 / 이윤학
사진:네이버포토
집으로 가는 길
- 이윤학
어지간히 취했어야 말이지
고구마 광주리를
허리에 받쳐 든 할머니가
철 대문을 발로 걷어찬다.
그는 오늘도 대취해서
투구봉 산 그림자에
깡마른 키 높이를 잡아먹힌다.
바글거리는 침 거품을 물고
나를 버리고 갔다는 말이지.
나를 버리고 갔다는 말이지.
집 나간 마누라 이름도
까먹어
입술에 침 거품만 물고
까치발을 들고 걸어간다.
삿대질을 하며 걸어간다.
그래, 가라고 해. 그까짓 거, 갈 테면 가라고 해.
고생만 지지리 해가지고 쭉쩽이 된 거, 갈 테면 가라고 해.
마른 나뭇가지 입에 문 까치
미루나무 꼭대기를 움켜쥔 까치
휘청거린다.
시집『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문지 2008
시인의 표지 글
어느덧 저수지 한가운데까지 도달했다.
뒷걸음질 치자니 얼음에 간 금들이 보이고
앞으로는 버드나무 줄기에 연초록 새순이
돋아나는 게 보이는 것이다. 지름길이었던
저수지 바닥까지의 수심이 떠오르는 것이다.
모든 길이 바닥이었다는 믿음이 깨지는 순간
그동안 비우지 못한 무게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짐을 벗고 헤엄쳐 가야 하는 길이 보이는 것이다.
- 1965년 충남 홍성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먼지의 집><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그림자를 마신다> 등
김수영문학상, 동국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