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퍼스나 / 강기원

폴래폴래 2010. 7. 13. 10:36

 

 

 

 

 

 

  퍼스나

 

                     강기원  

 

 

 

 밤의 식탁에서 나는 쓴다

 사흘쯤 굶어도 식욕이 없는 자

 신발 사이즈는 커지고

 브래지어는 B컵에서 A컵으로 줄고

 거울을 닦지 않는 자

 립스틱은 점점 진해지고

 뼈의 피리를 지녔으면서도

 느린 재즈의 선율에 눈 감지 않는 자

 사내의 땀내를 맡아도 달뜨지 않으니

 더 이상 사랑을 믿을 수 없는 자

 누구인가

 이 맛없는 자

 오미의 구별이 안 되는 자

 백색 스크린 같은 자

 얽힌 탱고의 다리 사이에서 태어났고

 요귀와 함께 자랐으며

 간절기마다 발작을 일으키던

 바람의 유전자를 지녔던

 너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네 얼굴 위에 벗겨지지 않을

 돌의 가면을 덮어씌운 자

 너의 알록달록함 잿빛으로 바꾼 자

 누구인가

 구멍 하나 없는 가면 속에서

 미라처럼 서서히 숨 막혀 가는 너

 이제 눈물샘마저 막힌 채

 혀가 굳어가는 퍼스나

 새벽이 오는 식탁에서 나는 쓴다 쓰고 있다

 

 

 

 

  시집『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민음사 2010

 

 

 

 

 

  - 1957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정외과 졸업.

     1997년『작가세계』신인상 등단.

      시집<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바다로 가득 찬 책>

      2006년 김수영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