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 외 2편 / 조용미
꽃잎
- 조용미
높은 곳에 서 있으면
바람의 힘을 빌려 몸을 날리는 꽃잎처럼
뛰어내리고 싶었다
허공으로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
봄 저물녘의 흰 꽃잎들
삶이 곧 치욕이라는 걸,
어떤 간절함도
이 치욕을 치유해주지 못한다는 걸
함석지붕에 떨어지는 소나기처럼,
붉은 땅 위로 내리꽂히는 장대비처럼,
어둑한 겨울숲에서 혼자 계곡으로 굴러 떨어지는
동백의 모가지처럼
높은 곳에 서 있으면
발아래 까마득한 것들 다 공중으로
불러들이고 싶다
역류하는 것들의 힘으로
떨어지는 나는 폭발물이다
시집『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문지 2007
거미줄에 걸린 빗방울들
- 조용미
폭우가 한바탕 쏟아지고 나서
베란다 창의 방충망에,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크고 작은 빗방울들이 잔뜩 걸려들었다
빗방울들은 저 망을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파닥일 날개조차 없이
손으로 한번 탁 털어주면 되겠지만 그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닌 것을
거미줄에 걸린 것들이 바람이나 노을의 분홍빛이라 해도
그것이 온전히 거미의 것이듯,
쭉쭉 물기를 빨아들여라
네 몸이 부어오를 때까지
투명한 저것의 뼈를 다 빨아 먹어라
네 몸이 변할 것이다
빗방울들이 촘촘한 정자살의 방충망으로
침입한다
자기 몸을 뭉그러뜨리며 스며든다
몸에 녹물이 들어가는 방충망,
방충망의 촘촘한 살이
녹아들어간다
누가 거미줄을 빨아 먹고 있다
시집『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문지 2007
고흐의 저녁 산책
- 조용미
반쯤 찬 달에 어두운 바람이 불었다
달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눈에 붉은 금이 그어졌다
달을 피해 게단을 뛰어올랐다
반으로 쪼개진 달은
따스한 사제묘역 위에 떨어져 박혔다
흰 달이 노랗게 어두워지던 순간이었다
스모그와 안개로 뻑뻑하게 뒤엉킨
강의 저물녘
유람선이 호수의 괴물처럼 어두워진 다리 아래를
소리도 없이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누리장나무 꽃들이 마구 찢겨져나간 자리에
푸르스름한 눈알들이 박히기 시작했다
분홍에서 보라로
작살나무의 작살이 겨누어지고 있었다
달이 막 몸을 던지던 날이었다
나는 죄 없는 귀를 가만히 만져보았다
눈에서 붉은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시집『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문지 2007
시인의 표지 글
직관적인 시선의 힘은 사물이나 풍경에 내재되어 있는 생명을 일깨운다.
풍경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그것에 귀 기울이면 존재가 심화되는 것을 느낀
다. 시선을 내부로 파고들수록, 사물들은 몸을 더 쉽게 열어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어느 순간 문득 느껴지는 미열이거나
서글픔 같은 것, 혹은 거품 같은 것은 아닌가. 천지를 나눈 사이에 빈 허공이
있고 그 쪼개어진 시원의 틈에 인간이 겨우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무수한
죽음이 삶을 키우는 것이리라.
아름다움은 인간의 세상을 능가한다. 그런 이미지가 살아 펄떡이는 시를
만나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 새로운 이미지는 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오직 새로운 시적 이미지들만이 순간을 거머쥘 수 있게
해준다. 새로운 이미지와 새로운 언어를 향한 갈망은 계속 시인의 살과 잠과
영혼을 앗아갈 것이다.
우리에게 자연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자연에서 배우는 것은 '변화'일 것이다.
만물이 모두 실체가 없고 상주가 없고 공적하여 손에 잡히는 것이 없이 흘러간
다는 것,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 이것을 늘 깨닫게 해준다. 변화를 자신의
존재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삶은 진정 자유로울 것이다.
- 1962년 경북 고령 출생.
1990년『한길문학』등단
시집<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일만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2005년 김달진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