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사루비아 / 이정록
폴래폴래
2010. 6. 29. 11:33
사루비아
- 이정록
신문지 위로 소나기 쏟아진다. 봄 여름 가을 사철 노숙하는 겨울코트가
묵직해진다. 스무 마리 남짓한 비둘기와 맨땅 겸상하는 나발 소주가 물
먹은 외투를 가로등에 묶어 비튼다. 남의 집 첫술부터 이놈에 먹물이 문
제였지. 질질 끌고 가서 에어컨 실외기에 팔자를 펴 말린다. 그림자도 먹
물이네, 덩치 큰 송풍기도 어깨 들썩이며 구시렁댄다.
신문도 급수가 있어. 욕 많이 얻어먹는 신문일수록 따듯하지. 면수가 많잖
아. 미끈미끈한 광고와 동침하려면 신혼방 꽃무늬 이불처럼 칼라라야 되지
않겠어. 금상첨화 원앙금침이라도 새벽에 술 깨면 추워야. 조중동 조스중동
하는데 중앙은 아예 안 써. 갓난애 이불처럼 쪼그마해서 말이여. 하여튼 안
마당에 기차 들어오고 옥상에 백화점 들여놓고 사는 놈 있으면 나와 보라니
까. 사루비아 꽃술이 그렁그렁 맞장구치려다가, 제 눈물 속 먼 하늘이나 들
여다본다.
소나기 쥐어짠 손바닥에 사루비아 피었다.
붓 빤 먹물 양동이 시원하게 엎어버린 서녘 하늘도 오랜만에 손금 환하다.
『서정시학』2010년 여름호
-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풋사과의 주름살><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제비꽃 여인숙><의자><정말>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