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69- 삼신할미가 노는 방 / 김선우

폴래폴래 2010. 5. 22. 22:28

 

 

 

 

 

 

  69-삼신할미가 노는 방

 

                                         - 김선우 

 

 

 

  오랜만에 고향집 안방에서 한낮을 백년처럼 뒹구는데 까츨하고 굽실한 희끗한 터럭 하나, 집어들고 햇살 속에 이윽히 뜯어보니 이것은 분명 그곳의 터럭 어머니의 것일까 아버지의 것일까 오래 전 돌아간 조부모의 그것이 장롱 밑에 숨었다가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햇볕 쪼이러 시남시남 나와본 걸까 희끗한 터럭 집어들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는 사이에 마음이 뜨끈하게 여울져오고 별안간 이 오래된 삼신할미 같은 방이 쌔근쌔근 더운 숨을 몰아쉬기 시작하는 거라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방이 무덤처럼 둥글게 부풀어 오르더니만 사방이 69 천지인 거라. 방구들과 천장의 69, 전등과 전등갓의 69, 문틀과 문의 69, 한 시와 두 시의 69, 이불과 요의 69, 자음과 모음의 69, 모서리와 벽의 69, 두 시와 세 시의 69, 얼룩들의 69, 얼룩이 얼룩을 낳고 얼룩이 얼룩 속에 제 몸을 비벼넣으면서, 쥐오줌과 곰팡이꽃의 69, 숟가락과 국그릇의 69, 주춧돌과 두꺼비집의 69, 옛날 옛적 산이었던 이 터와 지붕 얹힌 것들의 69, 죽은 것과 산 것들의 69, 어머니 태 속의 나와 어머니의 69

 

  그러고는 이 삼신할미 같은 방이 맨 나중으로 펼쳐 보여준 것은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69였는데, 흰머리 성성한 어머니가 외할머니 젖을 빨듯, 시든 아버지가 할머니의 젖을 빨듯, 이상하게도 자분자분 애틋한 소리가 온방에 가득해져 오는거라 방구들이 천장에게, 모서리가 벽에게, 한 시가 두 시에게, 삶이 죽음에게 젖을 물리며 늙은 방이 쌔근쌔근 숨을 쉬고 있는 거였다

 

 

 

 

 시집『도화 아래 잠들다』창비 2003

 

 

 

 

  -1970년 강릉 출생. 1996년『창작과비평』등단.

   시집<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등

   현대문학상 수상. ' 시힘 '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