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한낮, 정사는 푸르러 / 강정

폴래폴래 2010. 4. 5. 19:22

 

 

    사진:네이버포토

 

 

 

  한낮, 정사는 푸르러

 

                                  - 강정 

 

 

 

 길게 누워 있던 여자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그림자는 더 아래로 내려가 만물의 뿌리를 만지며 땅의 깊이를 더하였다

 여자가 길게 일어나자

 같이 누워 있던 햇볕이 산을 두어 개 넘어 어두운 마을 하나를 지도에서 지웠다

 다가올 시간이 지나간 시간 앞에서 더 먼 곳의 아이들을 달랬다

 꽃의 생몰 기간이 한나절쯤 줄었을까

 여자를 만졌던 시간이

 홀로 여자를 생각하던 시간을 삼킨 듯

 전혀 모를 남자가 등을 접은 채 유리창 속으로 사라진다

 엉겨붙어 흘러내리던 조금 전 그 자리가 물씬 차갑다

 여자의 머리칼이 수초처럼 휘날리며 하늘거리는 새 떼의 하늘을 휘감는다

 한 여자의 몸을 통과했을 뿐인데,

 어느덧 세상 밖이 발아래 놓였다

 풀죽은 下焦에 진짜 풀들이 죽어 있다

 만물을 뒤바꿔놓은 여자가 긴 다리를 딛고 일어선다

 다리 사이로 흰 물이 흘러내리는 걸 착각이었다고 믿는 순간,

 오전부터 읽던 책의 낱장들이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천체의 암반에

 이끼 낀 남자의 근골이 화석처럼 찍혀 있다

 얼굴을 잃고 몸 전체로 동굴이 돼버린 여자의 늑골에

 최초의 문장이 씌어지는 순간이다

 

 

 

 시집『키스』문지 2008

 

 

 

 

  - 1971년 부산 출생. 추계예대 문창과 졸업.

     1992년『현대시세계』등단.

     시집<처형극장><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산문<루트와 코드><나쁜 취향>

     현재 침소밴드 리드보컬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