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취한 밤 / 최승호

폴래폴래 2009. 12. 14. 00:41

 

 

 

사진:네이버포토갤러리

 

 

 

      취한 밤

 

                             - 최승호 

 

 

 데킬라 몬테알반 술병 속에는

 선인장 애벌레가 한 마리 들어 있다

 술에 절여져

 바닥에 누워 있는 벌레,

 그 물컹한 미해탈의 나비를

 술꾼들은 씹어먹곤 한다

 

 늦은 밤의 바에는 늘 취한 사내들이 있다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라!

 혀가 꼬여 돌돌 말릴 때까지

 횡설수설 거품을 물고 헛소리를 질러라!

 술꾼들이란

 오아시스를 찾아 방황하는 낙타들이다

 대도시의 고독을 잊고 싶은 낙타

 가슴의 사막에 독한 술을 들이붓는 낙타

 잔뜩 취해 자신을 지워버리고 싶은 낙타

 

 나도 늘 취해서 사는 것 같다

 나비의 꿈속에서 한 생을 살았던 장자(莊子)처럼

 혹은 공왕(空王)의 꿈속에 사는 허깨비처럼

 나도 허둥지둥 늙다가 사라지리라

 그러나 허공 같은 공왕은 죽지 않는다

 공왕은 허무를 모른다 우울을 모르고 술맛을 모르고

 술값이 얼마나 허망한지 모른다

 

 술에서 깨어난 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바에는 아무도 없다

 나와 빈 술병들과 쓰레기와

 헛소리의 유령들처럼 떠다니는 냄새들이 있을 뿐

 모두들 나를 버려둔 채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서정시학』2009년 여름호

 

 

           - 1954년 춘천 출생. 춘천교육대 졸업.

              1977년『현대시학』등단

              시집<대설주의보><진흙소를 타고>

              <세속도시의 즐거움><회저의 밤><고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