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 5박 6일 / 이덕규
선암사 5박 6일
- 이덕규
1
조계산 자락 선암사 입구
덩치 큰 굴참나무들이 툭툭 갈라터진 갑옷으로 중무장한 채
두어 명씩 조를 지어 서성대다가
느닷없이 나를 불러 세우고 검문검색을 한다
이것저것 마냥 쑤셔 넣은 식탐 많은 어린아이처럼
배가 불룩해진 배낭 속에 나도 모를 또 다른 무슨 꿍꿍이 속셈이?
피할 새도 없이
배낭 깊숙한 곳에 꽁꽁 묶어놓았던
마음자루 주둥일 풀어 보여주니, 일주문 옆 천석꾼 곳간보다 더 큰
해우소 가는 길부터 일러준다
2
물만 먹기로 한 지 닷새째, 밤새 눈 내리고 바람 불었다
산방에 갇힌 텅 빈 몸속의 캄캄한 적막에 웅크린 짐승 한 마리
끼니때마다 어슬렁 밖으로 기어 나와
둔해진 몸 부위별 지방 흡입 시술하듯 푸석살부터 물어뜯어 곱씹다가는
식곤증에 겨운 듯 제자리로 들어가 잠잠하다
아, 지금껏 폭식하는 마음이 비육해온 몸을 생짜로 조금씩 뜯어 먹는 단식의 몽롱한 포만감이여!
잠이 쏟아진다
이제 잠시 먹다 남은 육신을
이 산중에 쑤셔 넣어두고 그동안 은밀히 가고 싶었던
곳, 두루 마음만 다녀와도 되겠다
3
이른 아침 산사 뒤꼍 작설(雀舌) 밭에 올라
눈을 한 줌 뭉쳐 먹는다
입 안에 불이 붙듯 녹으며 감쪽같이 사라지는 눈의 흰빛 마음 뒤에
맑게 고이는
차디찬 물 한 모금이 다디달다
시집『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 2009
[시인의 말]
들판에서 일을 할 때,
어느 순간 힘의 한계에 이르러 미세하게 떨리는 손목 관절이나 장딴지 근육쯤에서
꽃 멍울 터지는 소리가 난다.
(몸을 아껴 쓰는 것은 生을 낭비하는 것)
척박한 몸속에서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그 힘겨운 감탄사가
정녕 시의 향기로운 입김이라면……, 나는 여전히 꽃다운 시절이다.
─土愚方에서 이덕규
- 1961년 경기 화성 출생.
1998년『현대시학』등단.
제9회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
시집<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