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가을에는 / 최영미

폴래폴래 2009. 10. 28. 21:06

 

 

 

 

 

 

          가을에는

 

                               - 최영미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창비 1994

 

 

         -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1992년『창작과 비평』등단.

           2005년<서른, 잔치는 끝났다>일본어판 출판.

           2006년<돼지들에게>로 이수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