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꽃 지는 소리 / 최명란

폴래폴래 2009. 10. 21. 21:23

 

 

 

 

 

 

        꽃 지는 소리

 

                                     - 최명란 

 

 

 

 꽃만 피면 봄이냐

 감흥 없는 사내도 품으면 님이냐

 준비할 겨를도 없이 다가와서는

 오래된 병처럼 나가지 않는 사내 가슴에 품고

 여인은 벌거벗은 채 서 있다

 가랑이와 겨드랑이와 가슴과 입술에서 동백꽃이 피어나

 그만 고목의 동백이 되어버린 여인

 가슴 도려내듯 서러운 날이면 입으로 동백꽃을 빨았다는

 수많은 날들 소리 없이 울며울며 달짝한 꽃물을 우물우물 빨았다는

 장승포에서 뱃길로 이십분 거리

 동백섬 지심도 동백꽃 여인

 육지를 버리고 부모 손에 이끌려 섬으로 와

 시집살이 피멍든 여인의 가슴은 검붉은 동백기름이 되어버렸다

 시든 것들이 오히려 더 질긴 법

 꽃답게 피었다가 꽃답게 떨어지는 일 쉽지 않구나

 지난밤 내린 비에 무참히 떨어진 동백여인의 시들한 몸이

 밀물 때린 갯바위처럼 차다

 가슴을 파고드는 파도의 냉기가 무리지어 달려와

 또 한 번 매섭게 여인을 내리치고 뒷걸음질 친다

 아하! 부러진 가지에도 꽃은 핀다

 여인의 가랑이에 겨드랑이에 가슴에 입술에

 다시 붉은 동백꽃이 핀다

 꽃만 피면 봄이냐

 붉기만 하면 꽃이냐

 

 

 

           시집『쓰러지는 법을 배운다』랜덤하우스 2008

 

 

 

              - 1963년 경남 진주 출생. 세종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2005년《조선일보》신춘문예 동시

                 2006년《문화일보》신춘문예 시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