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의 오솔길/시창고

악기점 / 배한봉

폴래폴래 2009. 8. 4. 08:33

 

 

 

                             사진:네이버포토갤러리

 

 

 

 

         악기점

 

                              - 배한봉 

 

 

 

 나무들은 몸 속에

 악기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악보는 태양과 구름과 바람

 별과 어둠, 그대와 나의 삶과 생각들

 

 오늘도 나는 악기들을 조율하러 과수밭에 오른다

 전지하고, 열매 솎고, 풀을 베고

 열매 따며 악기의 음계를 따라가면

 어느새 악기들은 나를 조율하는 조율사가 되어 있다

 내 삶의 곁가지를 전지하고 욕망을 솎고

 억세계 뻗쳐오른 번뇌를 조율하고 있다

 

 나무는 나를 조율하고

 세계를 조율하고 지휘한다

 나무 몸 속에서 악기들이 흘러나와 걸어간다

 나무는 나무 자신을 조율하고 탄주할 뿐인데

 비 내리고 폭설이 쏟아지고

 폭풍 몰아치고 해일이 인다

 봄,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온다

 

 나무는 연주를 마칠 때마다 몸 속에

 하나씩 나이테를 그린다

 나무 몸 속에 매미와 뻐꾸기

 태양과 별의 숙명이 머물고

 나무는 명상한다. 정적과 혼돈 뒤썩인

 끝없는 생명에 대하여

 

 한 알 과일을 먹은 뒤 오래도록

 우리 입 속에 남는 과일의 향연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과즙이여

 나무 악기의 음률이여

 오래도록 행복해지는 우리여

 나무 악기의 빛, 나무 악기의 어둠

 허공과 영혼을 소진하고, 시간을 금빛으로 소진하고

 이 세계의 생명으로 스며드는 침묵의 탄주여

 대지로부터 하늘로 치솟은 악기의 소용돌이여

 

 

 

         | 자서|

 

  작지만, 고향 선산을 개간해 과수농사를 지은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농사는 제게 땀이면서 시(詩)였고, 시이면서 삶이었습니다. 또한 몸과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것임을 알게 했습니다

  농업은 문명의 가장 반대편에 있지만 우리 삶과 가장 가깝습니다. 슬픔과 고통마저도 신명으로 뽑아올리는 근원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믿음이 주는 소박한 가치들 속에 사랑이 있고, 생명존중정신이 있고, 존재의 본질에 대한 따뜻한 꿈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때로 굿판 무당의 주술처럼 시가 저를 찾아와 놀 때는 과수밭 일로 아무리 몸이 고단해도 새벽별이 뜰 때까지 그 녀석과 놀았습니다. 그녀석의 만 가지 형상과 소리를 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노래가 <스스로 그러한> 존재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우리 삶이 아름다워지는 데 조금이나마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드려야 할 분이 많습니다. 성실히 이 길을 걷는 것으로 은혜를 갚겠습니다.

 

                                                                                                  2004년 10월

                                                                                                          배한봉

 

 

 

                       - 경남 함안 출생.

                          1998년『현대시』신인상 등단.

                          시집<흑조><우포늪 왁새>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