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강물이여 / 나희덕
사진:네이버포토갤러리
밤 강물이여
- 나희덕
낯선 물결이 반짝인다
바로 눈앞에서, 또는 아주 먼 곳에서
몇시간째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으니
누가 흐르는지 알 수가 없다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어디론가 흘러가는 기억의 포말들
밤 강물이여
여기, 나를, 내려놓는다
비로소 그를 미워할 수 있게 되고
비로소 그를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곳
아무리 오래 앉아 있어도
아무리 나를 깨우러 오지 않고
이틀쯤 굶어도 배고프지 않고
마음의 공복만으로도 배가 부른 곳
몸 속 깊이 잠들어 있던 강물이 깨어나
물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곳
밤 강물이 고요한 것은
더 깊이 더 멀리 움직이기 때문이다
시집『야생사과』창비 2009
시인의 말
야생사과를 처음 맛본 것은 낯선 대륙에서였다.
시큼하고 떫은, 그 길들여지지 않은 맛은
과일가게나 농부의 바구니에 담긴 사과와는 아주 달랐다.
야생의 열매를 쪼는 새들처럼 그곳에서 나는 어눌한 듯 자유로웠다.
익숙한 삶과 언어를 떠나 이방인이 되어보는 경험은
영혼의 입자를 새롭게 만들어 다른 삶으로 스며들게 해주었다.
내 안의 물기가 거의 말라갈 무렵 낯선 땅에서 물의 출구를 발견한 셈이다.
무수한 나를 흘려보내는 것이 첫 물줄기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었으니,
경계를 넘어서려는 의지와 기원에 대한 갈증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전에 삶이란 과거가 만들어낸, 견뎌야 할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과거가 미래를 만들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는 들뢰즈의 말처럼, 기억의 되새김질보다는 생성의 순간에 몸을 맡기고 싶다.
오늘도 봄그늘에 앉아 기다린다, 또다른 나를.
2009년 봄
나희덕
-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연세대 국문과 同대학원 박사.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현재 조선대 문창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