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 최서림
사진:네이버포토
구멍
- 최서림
나는 원래 구멍 안에서 만들어졌다.
껌껌하고 긴 구멍 안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불씨를 이어받았다.
聖火 봉송하는 릴레이 선수처럼.
아늑하게 조여주는 긴 터널을 뚫고 나와 드디어
거친 빛의 세계로 나왔다. 태초의 명령에 따라.
빛을 받아먹고 내 안의 불씨는
바람 센 땅의 삼나무모냥 자라 올랐다. 이글이글.
언젠가 나는 또 하나의 구멍으로 돌아가리라.
나의 불은 그 안에서 소멸되리라. 충직하게.
신화와 소문의 산실, 비밀스런 구멍은
내 몸이 드나드는 집이고
불이 제 길을 틀어 가는 통로이다.
나는 구멍으로 너를 사랑해 왔다. 정직하게.
사랑은 불이다. 참말로
나의 불은 눈구멍, 귓구멍, 콧구멍, 입 구멍, 땀구멍
그리고 처음으로 내가 빚어진 구멍을 통해
네 안의 핵발전소로 흘러들어간다. 법칙보다 더 고집스럽게.
불과 불이 얽혀서 핵처럼 터지는 사랑.
구멍 안에서 탄생하는 또 하나의 불씨 알.
또 하나의 눈물 방울.
시집『구멍』세계사 2006
자서
촉촉한
비에 젖은 돌같이
촉촉한 세상
구멍이 알차게 많은
구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세상
부서져 바스락거리는 生이
촉촉이 스며들어가서
잠들고 싶은
다시 태어나고 싶은
- 본명, 최승호 1956년 경북 청도 출생.
서울대 국문과 同 대학원 박사.
1993년『현대시』등단
현재 서울산업대 문창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