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의 오솔길/시창고

어떤 出土 / 나희덕

폴래폴래 2009. 6. 13. 13:01

 

 

 

 

 

 

 

                 어떤 出土

 

                                           - 나희덕 

 

 

 

 고추밭을 걷어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올리는데

 흙 속에 처박힌 달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불꽃 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를 하려고 밭에 다시 가보니

 호박은 온 데간데 없다

 불꽃도 흙 속에 잦아든 지 오래다

 자세히 드여다보니

 그녀는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의 죽음을 덮고 있는

 관두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한 웅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들!

 

 

 

 

            -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연세대 국문과 同 대학원 박사.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현재 조선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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