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네이버포토
반달편지함
- 이정록
오늘 밤엔 약수터 다녀왔어요. 플라스틱바가지 입술 닿는 쪽만 닳고 깨졌더군요. 사람의 입, 참 독하기도 하지요. 바가지의 잇몸에 입술 포개자 첫 키스처럼 에이더군요. 사랑도 미움도 돌우물 바닥을 긁는 것처럼 아프기 때문이겠죠.
그댈 만난 뒤 밤하늘 쳐다볼 때 많아졌죠. 달의 눈물이 검은 까닭은 달의 등짝에 써놓은 수북한 편지글들이 뛰어내리기 때문이죠. 때 묻은 말끼리 만나면 자진하는 묵은 약속들, 맨 나중의 고백만으로도 등창이 나기 때문이지요.
오늘밤에도 달의 등짐에 편지를 끼워 넣어요. 달빛이 시린 까닭은 달의 어깨너머에 매달린 내 심장, 숯 된 마음이 힘을 놓치기 때문이죠. 언제부터 저 달, 텅 빈 내가슴의 돌우물을 긁어댔을까요. 쓸리고 닳은 달의 잇몸을 젖은 눈망울로 감싸 안아요.
물 한 바가지의 서늘함도 조마조마 산을 내려온 응달의 실뿌리와 돌신발 끌며 하산하는 아린 뒤꿈치 때문이죠. 우표만한 창을 내고 이제 낮달이나 올려다봐야겠어요. 화장 지운 그대 시린 마음만 조곤조곤 읽어야겠어요. 쓰라린 그대 돌우물도 내 가슴 쪽으로 기울고 있으니까요.
- 1964년 충남 홍성 출생. 공주사범대 한문교육과 졸업.
1989년 대전일보,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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