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류인서 시읽기

폴래폴래 2009. 3. 24. 09:22

 

 

 

                                               사진출처:네이버포토갤러리 

 

 

 

 

  느티나무 하숙집          / 류인서

 

 

 

 저 늙은 느티나무는 하숙생 구함이라는 팻말을 걸고 있다

 한때 저 느티나무에는 수십 개의 방이 있었다

 온갖 바람빨래 잔가지 많은 반찬으로 사람들이 넘쳐났다

 수많은 길들이 흘러와 저곳에서 줄기와 가지로 뻗어나갔다

 그런데 발빠른 늑대의 시간들이 유행을 낚아채 달아나고

 길 건너 유리로 된 새 빌딩이 노을도 데려가고

 곁의 전봇대마저 허공의 근저당을 요구하는 요즘

 하숙집 문 닫을 날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 지금은

 느티나무 아래 평상을 놓고 틱틱 끌리는 슬리퍼, 런닝구,

 까딱거리는 부채, 이런 가까운 것들의 그늘하숙이나 칠 뿐

 

 

 

 

            전갈          / 류인서

 

 

 

 봉투를 열자 전갈이 기어나왔다

 나는 전갈에 물렸다

 소식에 물렸다

 전갈이라는 소식에 물렸다

 

 그로부터 나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빙그레 웃곤 하였다

 축축한 그늘 속 아기버섯도 웃었다 곰팡이들도 따라 웃었다

 근사하고 잘생긴 한 소식에 물려 내 몸이 붓고 열에 들떠 끙끙 앓고 있으니

 

 아무튼, 당신이 내게 등이 푸른 지독한 전갈을 보냈으니

 그 봉투를 그득 채울 답을 가져오라 했음을 알겠다

 긴 여름을 다 허비해서라도

 사루비아 씨앗을 담아오라 했음을 알겠다

 

 

 

 

              촛불         / 류인서

 

 

 

 어둠은 오늘도 우리의 우울한 안부로구나

 얼어붙은 창(窓)을 향해 당기는 부드러운 방아쇠와

 납방울처럼 다시 우리 귓속으로 떨어져 굳어가는 촛농의 말

 잠든 거리로 피 흘리는 어린 불빛을 물고 사라지는 외로운 저 작은 짐승

 

 

 

 

 

           - 경북 영천 출생. 2001년 시와시학 신인상.

             시집<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여우, 문학동네.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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