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네이버포토갤러리
느티나무 하숙집 / 류인서
저 늙은 느티나무는 하숙생 구함이라는 팻말을 걸고 있다
한때 저 느티나무에는 수십 개의 방이 있었다
온갖 바람빨래 잔가지 많은 반찬으로 사람들이 넘쳐났다
수많은 길들이 흘러와 저곳에서 줄기와 가지로 뻗어나갔다
그런데 발빠른 늑대의 시간들이 유행을 낚아채 달아나고
길 건너 유리로 된 새 빌딩이 노을도 데려가고
곁의 전봇대마저 허공의 근저당을 요구하는 요즘
하숙집 문 닫을 날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 지금은
느티나무 아래 평상을 놓고 틱틱 끌리는 슬리퍼, 런닝구,
까딱거리는 부채, 이런 가까운 것들의 그늘하숙이나 칠 뿐
전갈 / 류인서
봉투를 열자 전갈이 기어나왔다
나는 전갈에 물렸다
소식에 물렸다
전갈이라는 소식에 물렸다
그로부터 나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빙그레 웃곤 하였다
축축한 그늘 속 아기버섯도 웃었다 곰팡이들도 따라 웃었다
근사하고 잘생긴 한 소식에 물려 내 몸이 붓고 열에 들떠 끙끙 앓고 있으니
아무튼, 당신이 내게 등이 푸른 지독한 전갈을 보냈으니
그 봉투를 그득 채울 답을 가져오라 했음을 알겠다
긴 여름을 다 허비해서라도
사루비아 씨앗을 담아오라 했음을 알겠다
촛불 / 류인서
어둠은 오늘도 우리의 우울한 안부로구나
얼어붙은 창(窓)을 향해 당기는 부드러운 방아쇠와
납방울처럼 다시 우리 귓속으로 떨어져 굳어가는 촛농의 말
잠든 거리로 피 흘리는 어린 불빛을 물고 사라지는 외로운 저 작은 짐승
- 경북 영천 출생. 2001년 시와시학 신인상.
시집<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여우, 문학동네.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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