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깻대를 베는 시간 / 고영민

폴래폴래 2009. 3. 21. 10:05

 

 

 

                                           사진출처:네이버포토갤러리

 

 

 

          깻대를 베는 시간          / 고영민 

 

 

 

 깻대는 이슬이 걷히기 전에 베는 법

 잘 벼린 낫으로 비스듬히 스윽, 당겨 베는 법이라고 당신은 말했네

 무정한 생각이 일기 전

 밤이 다 가시기 전, 명백한 낯빛이 다 오기 전

 조금 애처롭게

 슬픔의 자리를 옮겨놓듯 천천히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

 

 아침밥을 먹기 전의 시간

 곤한 숨소리가 남아 있어 세상이 아직은 순정해져 있을 때

 쓸쓸하게 낫에 베이는 깻대여

 하지만 이슬은 사라지고 마는 것

 깻대를 베는 것은 어쩜 내 안에 와 있는 당신을 가르는 것과 같아서

 가만히 와서 가만히 가는 것을 일부러 가르는 것과 같아서

 터지는 슬픔 같은 것이어서

 

 깻대는 마음 축축하게 베는 것이라고 당신은 말했네

 이 밭에 첫 모를 옮길 때를 생각하며

 그늘 속에 잠든 당신을 탁탁탁 두드려 털 때를 생각하며

 싸락싸락 깨알이 바닥에 쏟아질 때를 생각하며

 덜 아프게 덜 아프게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

 

 아침 햇살이 큰 수레를 끌고 와 비로소 한 계절 가만히 저물다 간 것들을 옮겨 싣고

 깻대를 베는 것은

 여기 있는 나와 저만큼의 당신 같은 것이어서

 베인 깻대를 묶어 밭가에 세워두는 일은

 이슬이 걷히기 전,

 꼭 그 때에 해야 하는 것이라 당신은 간곡히 말하고

 

 

 

 

 

                       -2002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악어><공손한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