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나머지의 세계 / 이현승

폴래폴래 2009. 3. 16. 12:55

 

 

 

 

 

 

 

           나머지의 세계         / 이현승 

 

 

 1. 구멍

 꽃이 향기의 구멍이라면

 태양이 빛의 구멍이라면

 꽃과 태양을 뺀 나머지로서

 우리는 만져질 수 없고

 담기지 않으며

 우리는 느낄 수 있지만

 서로를 관통한다

 

 2. 손잡이

 문을 여는 일은 두 개의 동작으로 이루어진다

 손아귀에 힘을 준 채 손목을 비트는 일 그리고 잡아당기는 일

 두 개의 동작을 신속하고 매끄럽게 연결시킨다면

 아마도 이것은 호신술로도 유용할 것이다

 신음을 짜내며 팔이 꺾인다

 손잡이는 문의 안쪽과 바깥쪽에 붙어 있어서

 두 개의 동작으로 유려하게 문이 닫힌다

 이것은 물론 열매를 따는 일에도 쓸모가 있겠지만

 열매를 매다는 일은 당신의 소관이 아니다

 

 3. 이후

 부음을 들을 때마다

 나는 공기가 조금씩 더 무거워진다고 느낀다

 물방울들이 주전자의 주둥이에서 솟구쳐 빠르게 사라지듯이

 피와 살과 뼈를 뺀 나머지가 공기를 통해 경험한다

 아궁이 앞에 앉은 사람처럼 빛과 열이 하나라고 느낀다

 어느 순간 당신은 나의 내부로 들어왔으며

 충혈된 나의 안구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당신은 나를 지나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시 작 노 트

           음식물 쓰레기를 담은 봉지는 왜 새는 걸까? 물이 새지 않는 비닐봉지

        인데, 봉지를 들어낸 자리는 늘 축축하고 냄새가 난다. 그물을 자유자재로

        통과하는 물고기 같은 존재들, 생물지의 시작과 나중에 위치하는 자들, 그

        러니까 도무지 그대로 있는 것은 없다. 언제나 예기치 않았던 결과가 있고

        무언가가 진행중이다. 기분 좋은 냄새든 기분 나쁜 냄새든 같은 방식으로

        흘러다닌다. 어떤 것도 결정적이지 않다. 다만 아름답고 부지런하게 썩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결합의 다른 말이다. 마치 불꽃의 그 광휘처럼 또 열기

        처럼.

 

 

 

 

 

                    - 1973년 전남 광양 출생. 1996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2002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등단.

                       고대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시집 2007.<아이스크림과 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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